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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암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했다. 그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라 개창했다. 순종 원년(1907)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스님이 복원,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6.25 때 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에 대웅전을, 1971년에 요사를,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했다.

경내와 주변에는 1980년에 조성한 석굴, 추담대사 사리탑, 속리교, 세심교가 있다. 최초의 창건자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와 사자암지, 소요사지, 현암지, 원효사지, 조선 태조 행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고, 의상대, 나한대, 금송굴, 선녀탕, 선녀폭포, 청량폭포 등이 있어 경관을 더해주고 있다.

-안내문에서 발췌-

원효대를 지나 드디어 자재암에 도착했습니다. 암이지만 그래도 규모가 좀 있는~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금강문과 원효대

계곡을 지나 드디어 본격적인 자재암의 시작인 일주문에 도착했습니다. 매점과 쉼터도 있고 꽤 멋드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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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서는 스님께서 불공을 드리고 계셨네요.

코끼리 상도 멋지게~

마침 모노레일로 가스 등을 옮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네요. ㅎㅎ

자재암의 유래

원효 성사께서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있은후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두절된 심산 유곡을 찾아 산자 수명한 아름다운 이 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하여 높은 수행을 쌓았다.

비가 내리는 어느날 심야에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은 아녀자로 화현한 관세음보살께서 원효 스님에게 하룻밤 쉬어 가기를 원했고 중생구제의 구실을 붙여 수도 일념의 심지를 시험하였으나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 마음이 생한즉 올호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가지 가지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한즉 상대적 시비의 가지 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는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의 있노라, 하는 법문에 그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원효대사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임을 알았고 그후 지극한 정진으로 더욱 깊은 수행을 쌓았으며 후학을 교계할 생각으로 정사를 지었다.

관세음 보살님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정사를 이름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안내문에서 발췌-

기와나 문구도 멋드러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보물 제1211호

이 책은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한 주석서로 조선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발간한 것이다. 1권 1책이며 크기는 가로 19cm, 세로 31cm이다. 책의 끝 부분에 있는 한계희의 기록에 의하면, 왕명으로 한계희가 효령대군과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에 없는 전이 붙어 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불교문화재로서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에서 발췌-

보물도 소장하고 있는 암자라고 합니다.

나한전은 기암절벽 아래에 지어져 더 멋스럽네요.

오래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정비된 듯~

나한들도 한 컷~

원효샘

원효 스님은 차의 달인으로도 알려진 고승이다. 많은 절을 창건하였는데 원효 스님이 자리를 잡은 절터엔 필연적으로 약수가 나오며 찻물로는 으뜸인 석간수가 솟아 올랐다고 한다. 그 중 1300여 년 전 수행하셨던 소요산 자재암의 원효샘 석간수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수로 이름 나 있다.

신라,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특히 고려시대 시인인 백운 이규보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하였다.

-안내문에서 발췌-

용 뿔이 하나 떨어져 나갔지만 물은 시원하니~

이제 청량폭포 구경하러~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청량폭포와 삼성각

소요산 자재암 나한전 기암절벽 옆으로 청량폭포가 흐르고 있습니다. 수량이 많진 않지만 높이가 그래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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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가

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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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팸투어로 소요산에 다녀왔습니다. 단풍과 소요산을 형상화한 대문은 이제 철거하고 새로 세운다고~ ㅎㅎ

휴식 공간은 이리저리 잘 되어 있는 듯~

확실히 가을 단풍 때 좋을 것 같습니다.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과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거닐던 산이라 해서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예로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하여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과 폭포, 가을에는 오색 단풍으로 경관이 매우 빼어나 휴양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소요산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비롯해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의 여섯 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의 능선과 기암괴석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져 있다.

-안내문에서 발췌-

어디서 본 느낌이다~ 했던 알 조형물은 남이섬의 강우현 대표가 도자를 활용한 작품이라고 하네요.

반공희생자 위령탑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생 당일 점령당하여 50년 10월 8일 국군 8사단에 의하여 수복될 때 까지 양주군 이담면(동두천시), 은현면 거주 군경가족과 반공 애국청년들이 학살, 납치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흐른 후 황해 도민회(회장 강현심), 구월산 유격대 생존자 전우회(회장 박지문), 관내 학살 희생자 유족회(회장 박중양, 이창환), 한국 반공연맹과 동두천시, 소요산 자재암의 협조에 힘입어 관내 학살 희생자 22위, 황해도 신천, 은율, 송화지역의 1950년 10. 13 반공의거 희생자, 구월산 유격대 전사자 1472위의 위패를 모셨다.

높이 12m, 폭 2m 규모에 탑신은 3면이고 가운데 흑색 선은 희생자에 대한 조의를 표한 것이고,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70개의 기단 돌은 7만 당시 동두천 시민의 정성을 의미한다.

-안내문에서 발췌-

요즘엔 해충 기피제 같은 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좋네요. 바람 분사기는 많이 봤는데 오오~

계곡형 쉼터 공간도 많고~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일화가 유명하다 보니 계곡 음식점 골목에도 귀엽겤ㅋㅋㅋㅋㅋ

요석공주가 과부였다는 건 이번에 알았네요. ㅎㅎ

단풍 압화 느낌으로~

계곡이 쭉쭉~

단풍도 벌써 볼 수 있었고~

독립유공자 추모비는 의병장 송천 김연성 지사 등 동두천 출신 독립유공자 28위를 추모하고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지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지난 1996년 건립됐다고 합니다.

신라 29대 무열왕녀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사모하여 공주궁을 짓고 설총을 길렀다는 주초의 흔적이 남아있고 정상인 의상대 옆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이름을 지었다는 공주봉도 있다.

특히 자재암은 신라 중엽 원효대사가 개산하였으며, 고려 광종 25년(974)에 각규대사가 왕명을 받아 정사를 세웠으나 고려 의종 7년(1153)에 소실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재건과 소실을 되풀이하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1년에 재건하였다.

소요산에는 이 외에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행궁지도 남았다.

-안내문에서 발췌-

요석공주 별궁지라는 표지석만 남겨져 있는데 포토존도 꾸며놓은~ ㅎㅎ

계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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