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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라, Il Bel Paese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여기 이탈리아 지도가 그려진 원형 카펫에 포르마지오 델 벨 파에제(FORMAGGIO DEL BEL PAESE)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의 '벨 파에제'는 19세기 신학자 안토니오 스토파니(Antonio Stoppani)가 이탈리아 반도의 지질학적 특성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소개한 책의 제목이자 이탈리아 국민 치즈 브랜드의 이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단테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와 같은 문인이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쓴 표현이기도 합니다. 1994년 카스텔로 디 리볼리 현대미술관(Castello di Rivoli) 로비에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당시 수많은 방문객에게 짓밟혀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 환상적인 자연과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이탈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관광산업은 나라를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얼룩진 카펫을 통해 이탈리아가 가진 환상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실제로 겪고 있는 정치 경제적 갈등 사이의 간극을 파고듭니다. 이번 전시에서 이 카펫은 관객이 밟지 못하도록 설치되어 마치 '아름다운 나라'라는 브랜드를 소개하는 상품처럼 자리 잡고, 복잡다단한 국가적 정체성과 상품의 논리를 머금은 채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1편에 이어서~

상당히 큰데 한국 전시에서는 밟지 못하게 전시된 게 웃프기도 합니다.

 

[리움 미술관] 마우리치오 카텔란 : WE - 1

리움 미술관에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가 열린다는 말에 예약해 보려 했지만 가끔씩 들여다보다 보니 몇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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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Untitled 2023

전시장 높은 곳에 한 소년이 위태롭게 걸터앉아 드럼을 치고 있습니다. 천진하게 드럼을 치는 소년의 모티프는 퀸터 그라스(Ginter Grass)의 소설 <양철북(The Tin Drum>(1959)의 주인공 오스카입니다. 어릴 때부터 비범한 지적 능력을 갖춘 오스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한 시대와 어른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자 높은 곳에서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3살 이후 자라지 않은 오스카는 위기가 닥치면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오스카는 엄숙한 나치 집회에서 드럼으로 흥을 돋우는 바람에 행사를 망쳐버리기도 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미술관에서 천진하게 드럼을 치는 소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안내문에서 발췌-

2층에서도 잘 보여서 인기가 많네요.

청아하니 잘 두들기는~

간단히 동영상으로도 남겨 본~

 

그것, It 2023

검은 고양이는 여러 문화권을 가로질러 액운을 불러온다는 오명으로 인해 기피 대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 똑똑한 조력자로 등장하거나 오히려 행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양가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이 동물은 1995년 대중가요 듀오 터보가 리메이크하면서 전 국민적으로 알려진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네로'라는 장난꾸러기 고양이를 향한 이 노래의 원곡은 이탈리아 동요 "검은 고양이를 주세요(Volevo un gatto nero)”입니다. 동요의 화자는 흰 고양이 말고 꼭 검은 고양이를 원한다고 투정 부립니다. 하지만 전시장에 놓인 검은 고양이는 우리를 등지고 생각을 숨긴 채 새초롬하게 앉아 있습니다. 마치 작품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양가적인 감정과 여운을 남기는 카텔란처럼 말입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면벽 수행~ 일부러인지 하필이면 틈이 있어서 ㅎㅎ

우리, We 2010

두 남성이 가지런히 누워있는 침대가 놓여있습니다. 양복을 입은 두 남자의 모습은 장례식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둘 다 카텔란의 얼굴과 무척 닮았습니다. 쌍둥이인지, 도플갱어인지, 복제 인간인지 모를 두 인물은 서늘한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하고, 고약한 농담 같기도 합니다. 현대미술에서는 작가의 정체성이 일종의 예술적 실천이 되기도 합니다. 196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두된 개념미술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대표 주자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는 1973년 자신을 알리기에로와 보에티라는 두 사람이 합쳐진 쌍둥이라고 선언합니다. 관객을 향해 마치 두 명의 같은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는 듯한 사진 작업 <쌍둥이(Gemelli) (1968)는 개인과 사회 질서와 무질서를 왕복하는 작가의 분열적 존재와 실천을 잘 대변해 줍니다. 카텔란의 이중 자화상 역시 삶과 죽음, 권위에 대한 오마주와 전복을 한꺼번에 단행하는 태도와 겹쳐집니다. 한 쌍의 창백한 얼굴은 우리 안의 내적 갈등과 모순을 들여다보도록 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블랙과 네이비로 약간 미니미 하게 작업된~

아버지, Father 2021

발바닥의 주름, 굳은살, 흙먼지가 전부 보일 정도로 크게 그려진 이 벽화의 제목은 <아버지(Father)> 입니다. 발의 주인이 누워있는 듯한 구도는 카텔란의 고향인 파도바 출신의 화가 안드레아 만테L(Andrea Mantegna)가 15세기에 그린 <죽은 그리스도(Lamentation of Christ)> 속 예수의 못 자국 난 발을 연상합니다. 만테나의 그림은 신체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을 마주하도록 하여 예수의 인간성과 고난을 극대화합니다. 한편, 발바닥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게릴라 지도자 체 게바라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눈을 뜬 채 맨발로, 영웅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사진 찍혔고, 그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외에도 극한의 훈련을 견뎌온 운동선수의 너덜너덜한 발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벽화 속 발의 주인은 카텔란입니다. 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의 발 대신 어려서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을 도왔던 자신의 발을 내놓은 카텔란은 아버지의 의미를 되묻습니다. 이 발바닥 기념비 이미지는 아버지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삶의 굴곡이라고, 숨기려고 해도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거대하고 숭고한 발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실제론 카텔란의 발이었다는 게 또 좋았네요. 자신도 아버지가 되었을 터이니 의미 있는~

유령, Ghost 2021

미술관 로비와 전시장 곳곳을 자세히 둘러보면 박제된 비둘기들이 곳곳에 놓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도심의 비둘기는 경관을 해치는 불청객 취급을 받거나 유해 조류로 분류되곤 하지만, 사실 높은 지능으로 주어진 환경에 수월히 적응하고, 역사적으로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비둘기가 지닌 복합적인 의미와 인간과 맺는 양가적 관계는 미술관으로 들어왔을 때 증폭된다. 카텔란은 전시되는 장소와 맥락에 따라 비둘기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이탈리아 파빌리온에서 이 작업을 처음 공개했을 때는 "관광객", "유령", "어린이"와 같은 제목을 통해 낯선 존재와의 공존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을 "유령"이라 부르기로 했다. 비둘기들은 마치 유령처럼 조용하지만 강렬하고 섬뜩한 존재감을 행사하며 미술관 곳곳에서 우리를 지켜본다.

-안내문에서 발췌-

박제 비둘기가 사방에 있어서 뭔가 했더니 예전부터 많이 쓰인 작업이라고 합니다.

뭔가 세계관적이라 공간을 꽉 채우는 느낌이 들어 좋네요.

3층 말고는 정말 눈에 많이 띄었네요. ㅎㅎ

무제, Untitled 2021

뜬금없이 바닥을 뚫고 머리를 내민 인물이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경로로 전시장에 침입한 인물은 카텔란을 많이 닮았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선보인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Museum Boljmans Van Beuningen)에서는 마치 그림을 훔치려는 듯 18세기 네덜란드 대가의 회화가 잔뜩 걸린 방에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마리오 모니첼리(Mario Monicelli) 영화감독의 1958년 작품 <마돈나 거리에서 한탕(I Soliti Ignoti)>에서 전당포에 침입하려고 구멍을 뚫었지만 웬 아파트 부엌으로 나오게 된 주인공처럼 황당한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단지 새로운 시선에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았거나 바닥 아래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비현실적인 연출은 기성 미술계가 기대하는 영웅적 예술가가 아니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외부인과 같은 카텔란 자신의 위치를 드러냅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뭔가 귀여운 인상으로 더 잘 어울리는~

까치발을 살짝 들고 있는 것도 굿굿~

빼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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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가

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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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미술관에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가 열린다는 말에 예약해 보려 했지만 가끔씩 들여다보다 보니 몇 달을 실패하다 드디어 막판에 성공해서 다녀왔습니다. 비가 오기도 했고 이동 시간이 많이 들어서 로비의 작품들은 못 봤네요. ㅜㅜ 그래도 무료 전시라 부담 없이 대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대부분 키치 해서 지금 봐도 잘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드네요. ㅎㅎ

무제, Untitled 1999

검은 캔버스가 알파벳 '제트(Z)> 모양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캔버스를 찢은 것은 카텔란이 최초는 아닙니다. 1950-60년대 이탈리아 화가이자 조각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는 색면 캔버스에 대각선 방향으로 칼자국을 내 평평한 캔버스 너머의 공간을 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파괴를 통해 창조하는 역설이자 미술 전통의 제약을 뛰어넘는 혁신이었습니다. 이는 미술 제도의 경계를 시험하고, 끊임없는 도발로 미술의 역할을 질문하는 카텔란의 태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카텔란은 대각선 방향으로 캔버스를 훼손한 폰타나의 대표작을 그대로 모방하는 대신 지그재그 모양으로 칼집을 냅니다. 수많은 대중 매체를 통해 리메이크된 허구의 인물 '조로'처럼 말입니다. 조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정의를 구현한 다음 현장에 재빠르게 '제트(Z)를 그려놓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이처럼 이 검은 캔버스는 허구적 인물과 실존 인물, 대중문화 속 캐릭터와 미술사의 거장이 교차하는 장으로 거듭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보고 바로 조로가 생각나긴 했지만 진짜 조로였을 줄이야 ㅎㅎ 해설도 무료로 골전도 이어폰과 연결된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보이드, Void 2019

카텔란을 닮은 두상 조각에 카란의 모든 작품을 축소해 만든 작은 모형이 무질서하게 붙어 있습니다. 이처럼 작품들이 빼곡하게 축적된 얼굴의 제목은 빈 공간을 뜻하는 <보이드(Void)>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미술사에서 '보이드'란 제목은 프랑스 신사실주의 작가 이브 클랭(Yves Klein)이 1958년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Iris Clert Gallery) 공간을 텅 비운 전시 《더 보이드(The Void)))를 소환합니다. 하지만 카텔란의 <보이드>는 시각적으로는 이브 클랭의 동료 작가인 아르망의 '축적(Accumulation) 작업을 전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신사실주의 작가들이 비물질과 물질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며 시대상을 재현했다면, 카텔란은 이러한 미술의 실험정신을 개인적 서사와 익살스럽게 교차시키며 미술의 신화를 농담처럼 벗겨버립니다. 루치오 폰타나의 상징적 제스처가 조로의 제트(2)로 희화되듯, 이 작품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의 비움과 채움을 교차하여 카텔란의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작가적 정체성을 냉소적으로 재현하며 '보이드'를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이 작품은 30 프린팅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작가의 수작업을 거치지 않는 개념미술의 외연을 오늘날의 기술로써 확장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덩어리에 붙여낸 게 말년의 작품으로 딱 어울릴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도 다수가~

보이드라지만 오히려 흰 공간이라 팽창하는 느낌도 듭니다.

초입에 맞이해주는 작품으로 잘 어울렸습니다.

언뜻 괴혼 느낌도 나고~ ㅎㅎ

무제, Untitled 2001

여기 아주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타기를 기다리는 듯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형 엘리베이터는 전시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동물 친구들을 위한 것일까요? 카텔란은 작품을 크게 부풀려 스펙터클을 연출하기보다 여느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를 축소하여 작품의 권위를 걷어내는 동시에 동화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냅니다. 이에 미술관은 훌륭하고 거대한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고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 주변을 되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위한 장소가 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거대한 벽의 밑, 생쥐가 다닐 것 같은 엘리베이터는 개폐도 되고 소리까지 나는 게 진짜 재밌었네요. ㅎㅎ

다들 기다렸다가 찍길래 귀여워서 한 번~

 

무제, Untitled 2008

누군가 신다 버린 낡은 부츠에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2008년 이 작업을 처음 선보인 독일 풀하임-스톰멜른(Putheim-Stommeln) 유대교 회당은 1930년대 반유대주의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철거될 운명이었지만, 한 농부가 회당을 곳간으로 전용하여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90년대에 지역 문화 센터로 개조된 회당은 지금까지 건재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요람이 된 부츠는 역경 가운데 놀라운 저항과 회복의 힘을 보여준 회당의 역사처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편, 낡은 신발은 반 고흐가 즐겨 그리던 소재이기도 합니다.

흙투성이 신발을 그린 고흐의 그림에서 소박한 소재로부터 숭고한 가치를 읽어내는 순례자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이탈리아의 농가에서는 헌 신발에 꽃이나 허브를 심어 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고된 세월, 심지어 죽음을 연상하기도 하는 주인 없는 부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생의 주기를 상기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이탈리아인답게(?) 고추를 심어 놓았는데 한국과도 잘 어울리네요. ㅎㅎ

노베첸토, Novecento 1997

말이라는 동물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의용을 자랑하며 우아하게 전진하는 말은 문화사적으로 강력한 영웅적 이미지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천장에 매달려 있는 이 말은 중력의 힘에 항복하여 다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 <노베첸토(Novecento)>는 1900년대를 뜻하는 동시에 양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며 이탈리아 파시즘의 흥망성쇠를 그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장편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21세기를 당면한 1997년 처음 선보인 이 말은 위를 향해 부상하는 힘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 사이에 있습니다. 유예된 상태의 말은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의 이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동시에 다가올 미래를 향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안내문에서 발췌-

박제 말을 사용해서 그런지 꽤 실감 납니다.

정면에서는 좀 더 기괴하니~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잘 유지되는 게~

2층에서 봐도 무게감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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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가

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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