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한 눈망울의 회색 당나귀 EO는 세상의 전부였던 서커스단으로부터 구조된 뒤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에 오른다. 평화로운 농장, 훌리건으로 가득한 축구장 공포의 소시지 공장, 쇠락 직전의 저택... 다양한 공간을 오가며 겪은 인간 세계는 다정하면서도 잔혹하다.
당나귀 발타자르를 모티브로 하여 동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생각보다 인상적이었네요. 현재를 편견 없이 조망하는 이오의 눈은 말은 못 해도 많은 것을 반영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전위적이기까지 하지만 한 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봅니다.
4 / 5
이하부터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오는 서커스에서 일하는 당나귀였는데 따스한 주인인 카산드라(산드라 지말스카)와 함께 공연하며 나름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동물단체에서 동물을 구해야 한다고 강제로 해산시키며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봤을 때는 집 찾아가는 백구 이야기 뭐 이런 건가 싶었는데...
운동을 위한 사회 운동가들을 비판하는 느낌도 들고 이오의 방황을 보며 사회적인 시선으로 가족을 갈라놓고 위탁가정을 전전하는 아이들 생각도 났네요. 물론 그렇게 구원받은 아이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동양적인 시선에선 둘의 헤어짐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공연 이외에도 서커스에서 짐을 나르는 일도 했지만 구호되고 나서도 멋지게 살아가는 말과 달리 허드렛일을 전전하게 되는 이오의 인생은 흙수저의 인생을 대변해 주는 듯도 하여 씁쓸했네요. 그런 시선까지 진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나이가 무색하게 감각적으로 담아내 좋았습니다.
그러한 말을 달래주는 사이 이오는 사고를 치게 되고 당나귀만이 있는 농장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거기서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동물 봉사 활동도 하지만 홀로 바깥에서 격리된 걸 보면 여전히 어울리진 못하고 있는데 카산드라가 찾아오면서 이오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카산드라 역시 아직 이오와의 이별에 큰 슬픔을 느끼는 상태로 보이고 서커스 역시 아마도 문을 닫게 되었을 테니 참...
하지만 당연히 그 먼 길을 찾아가는 건 쉽지 않았는데 숲에선 늑대에게 죽을 뻔도 하지만 오히려 사냥꾼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게 흥미롭습니다. 여러 번 잡히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인간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게 인생사답네요. 물론 절대적으론 피해를 많이 받기 때문에 쌉싸름한...
축구 팬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그렇지만 치료 이후에 다시 동물보호소에서 일하게 되는데 안락사를 당한 동물 시체들을 끌고 다니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네요. 세상의 잣대로 분리되었지만 서커스와 마찬가지로 일은 일대로 하면서 가족과도 떨어져야 하는 이오의 처지는 정말 처량했습니다.
결국 이오는 딱 한 번 인간에게 반항하는데 뒷발로 보호소 직원을 죽임으로써 탈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저 일하던 노동자였을 뿐이라 모두가 안타까웠네요.
다른 말들과 살라미 용으로 실리게 되는 부분에선 정말 어떻게 끝내려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트럭 기사를 이용해 이민자로 보이는 문제까지 꺼내는 게 대단했네요. 긴 이동으로 말과 이오의 표정이 계속 잡히기도 했었기에 탁월한 연출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는 동유럽의 이민 최전선국으로서의 이미지가 있다 보니 살해까지 이어지는 범죄 묘사는 상당히 과감했네요.
거기서 우연히 또 마주친 인간이 집으로 돌아가는 신부 바토인데 기름이 떨어져 사러 온 휴게소에 벌어진 참혹한 범죄현장에서 말만 신경 쓰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에 이오를 빼돌립니다. 승용차로 어떻게 이오를 데려가려는 거지 싶었는데 부잣집 아들이라 말 운반 트럭을 불러 해결하는 게 참ㅋㅋㅋㅋ
밑바닥 인생을 훑고 지나 이제 광명을 찾는 건가 싶었지만 바토의 도박으로 이 집 역시 풍비박산 나있었고 계모(이자벨 위페르)는 집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도박으로 돌아온 거냐 추궁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계모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온 것 같은 키스 묘사로 이어지며 이오가 떠나는 게 정말 프렌치스러웠네요.
방황하던 이오는 소 무리에 섞이게 되고 도살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거부감 없이 마지막 기계 앞까지 도착하는 모습은 비단 짐승으로서 만의 회의감이 아니라 세상에 찌들어 내려놓고 싶은 이들에 대한 묘사도 겸하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후련함마저 드는 엔딩이었네요.
카산드라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결국 이오의 끝은 자살이었으니 안타까우면서도 이런 과정을 그저 흘러가듯이 담아낸 감독의 연출이 마음에 드는 영화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끊임없이 일하다 마지막엔 결국 살라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게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 살아가는 게 소시민들의 삶이니 착잡하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네요.